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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에 죽어 86년을 산 의기의 화신 [기사]

하늘보리 0 51 05.01 04:19

진심으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감사드립니다. 존경합니다.

[나의 역사 문화유산 답사 ⑧] 윤봉길과 충남 예산 덕산면 윤봉길 생가

[오마이뉴스 글:홍윤호, 편집:최은경]


▲ 윤봉길과 김구  거사에 앞서 김구와 함께 찍은 기념 사진, 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촬영한 것이다. ⓒ 홍윤호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눈을 빛내고 있는 25세의 한 청년이 있었다. 짧은 세월을 살아온 그에게 남은 생에 대한 미련이나 망설임이란 없었다. 더구나 이미 어제 이화림이라는 여전사와 함께 부부로 가장하여 식장을 사전 답사해서 그런지 익숙한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1932년 1월 상하이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바다를 건너와 상하이를 점령, 장악하고 천장절(일본 국왕 탄생일) 겸 전승 축하 행사를 거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만주를 침략(1931년 만주사변)한 일본에 대한 중국과 국제사회의 비난과 위기 의식이 고조된 때였으나, 아무도 이를 막아내지 못하던 때였다.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장제스의 30만 국민당군은 패배하여 쫓겨 갔고, 상하이는 일본군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상하이 한복판에서 거행하는 화려한 행사는 1만여 명의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오전 11시 20분 경 1부의 열병식이 끝나고 곧 이어 2부의 축하식이 이어졌다.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와 주중총영사 무라이의 축사가 끝나고 참석자 모두가 일어나서 엄숙하게 기미가요를 합창하였다. 축하식이 절정에 이른 순간이었다.

이때 군중들 사이에서 그가 움직였다.

1930년 23세의 나이에 독립운동의 뜻을 세운 다음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는다)을 남기고 집을 나온 지 햇수로 3년째, 그는 고향에 두고 온 처자식이 잠시 눈에 밟히긴 하였으나, 곧 품속에서 두 개의 폭탄을 꺼냈다. 하나는 수통형 폭탄, 그리고 하나는 자결용 도시락폭탄.

그는 수통형 폭탄을 꺼내들고 2~3m 더 전진해 들어가 행사장 무대를 향해 숨을 고른 다음 하나 둘 셋~ 온 힘을 다해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폭탄은 무대에 정확히 떨어졌고, 바로 큰 폭음을 내며 순식간에 무대를 날려 버렸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을 비롯하여 제 9사단장 우에다 중장, 해군 사령관 노무라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 단상 위 7명의 장군들과 참석한 인사들이 모두 쓰러졌다. 거류민단장 가와바타는 배에서 창자를 쏟으며 단상 위에 꿇어앉아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행사장은 난리가 났다. 비명소리와 자욱한 연기,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일본군 장성들, 이리저리 흩어져 도망가는 사람들, 아수라장이었다. 무대 주변에 있던 일본군 헌병들이 혈안이 되어 폭탄이 던져진 지점으로 몰려들었다.

그는 자결용으로 준비한 도시락폭탄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빨랐다. 헌병이 그를 덮쳤으며, 뒤이어 몰려든 군중들에게 뭇매를 맞아 옷이 찢겨졌고,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이 거사 직후 일본군 헌병대, 정보부대가 총동원되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고, 그에 대해서는 이틀간에 걸쳐 배후 세력과 지시한 자에 대한 지독한 고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5월 10일 한인애국단장 김구가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까지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이름 윤봉길. 꽃이 만발한 4월, 25세의 한창 나이에 일제 강점기 수많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이 일제의 힘과 일제 치하의 현실을 인정하고 나약한 지식인이 되거나 일제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해가는 상황에서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 의거의 주인공이었다.

▲ 윤봉길의사의 순국 직후  십자가 모양의 틀에 묶이고 무릎을 끓린 채 총살형을 당했다. 이마의 관통상이 선명하다.
ⓒ 윤봉길의사기념관


게다가 그는 끝까지 의연했다. 사형 집행 직전, 형 집행을 담당한 검찰관이 유언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사형은 이미 각오한 바, 하등의 할 말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요즘 말로 하면 쿨하고 담백했다고 할까. 결국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30분, 먼 이국 땅 일본에 끌려가 가나자와 육군 작업장 인근 골짜기에서 총살형으로 장렬히 삶을 마감하였다.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주력 부대 제 9사단 본부가 있는 가나자와를 그의 사형 장소로 결정했고, 그를 골짜기로 끌고 가 십자가 형틀에 묶은 다음 거적대기에 무릎을 꿇린 굴욕적인 자세로 형을 집행했다. 그리고는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한 구석,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에 땅을 파고 묻은 뒤 아무런 흔적이나 표시도 남기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유해 위로 지나가며 밟으라는 의미였다.

▲ 도중도 윤봉길 생가 풍경  먼 곳에 보이는 생가가 광현당, 가까이 보이는 초가집이 부흥원이다. 섬속의 섬 도중도는 윤봉길의사가 태어나고 자란, 그의 보금자리이자 의기를 굳힌 결심의 공간이기도 했다.
ⓒ 홍윤호


윤봉길 생가 도중도에 가다  

4월 중순, 윤봉길이 태어나고 자란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도중도에 찾아갔다.

도중도(島中島), 섬 속의 섬, 윤봉길이 붙인 이름이다. 수덕사가 있는 덕숭산에서 흘러내린 하천과 용봉산에서 흘러내린 냇물이 합류하면서 작은 섬을 이룬 특이한 지형, 일제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섬 속의 섬이라는 뜻을 내포한 명칭이다. 사방이 하천이라 수시로 범람하는 땅이었으나, 조부 윤진영이 이곳 도중도를 개간하여 농토를 만들었고, 아버지 윤황이 물려받았다.

지금은 말끔하게 정비되어 입구에서도 한눈에 전체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소나무, 느티나무, 사철나무, 호두나무 등이 자라고, 무궁화와 맥문동, 백일홍 등의 꽃이 피는 타원형의 독립된, 작은 세상이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 걸리지 않는, 그저 산책로를 따라 한 바퀴 걸어 다녀도 힐링이 될 만한 아늑한 공간이다.

1908년 6월 21일, 윤봉길은 이 도중도에서 태어났다. 광현당에서 태어난 그는 4세 때 도중도 바로 옆의 저한당으로 이사 간다. 이 집들은 1974년에 보수하면서 광현당(光顯堂, 빛이 나타난 집, 윤봉길의 탄생을 높인 말), 저한당(?韓堂, 한국을 건져 내는 집)의 이름이 붙었다.

▲ 광현당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4세때에 저한당으로 옮겨갈 때까지 살았던 곳. 1974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홍윤호


그는 1919년 12살 되던 해, 3.1운동 당시 예산 지역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부모님께 "저는 일본 사람 되라는 학교에는 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보통학교를 자퇴하여 서당에 다니며 개인적으로 공부를 한다. 식민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이미 10대 때에 싹튼 것이다.

1926년부터는 야학을 개설하고 독서회 활동으로 지속적인 농촌계몽운동을 하였다. 도중도의 광현당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부흥원이 있다. 그가 야학을 개설하고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매달 애국 강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처음 저한당에서 시작했지만,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져 새로 짓고 본격적인 활동을 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 3권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고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데에 자극을 받은 데다 그가 운영하던 야학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자 망명을 결심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식민지하의 농촌 운동은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 것이다.

▲ 저한당  기념관에서 도중도 가는 길에 있다. 윤의사가 실제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낸 그의 집이다.
ⓒ 홍윤호


1930년 3월 6일, 그는 아내에게 "물 좀 한 그릇 주오."라고 말하고 받아 마신 다음 고향 땅을 떠났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는 몰랐지만, 그때 아내는 둘째 아들을 임신 중이었다. 

그의 삶의 터전이자 이상촌 건설을 위해 주력했던 짧은 젊은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 도중도. 그의 목표가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자 더 큰 뜻을 품고 미련 없이 정든 고향을 떠난, 어찌 보면 매정한 인물.

하지만 오늘날의 도중도는 그의 생가가 있는 유적지로 잘 가꾸어져 있고, 차가 들어오지 못하는 작은 섬의 편안한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 방문하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마을 도로 옆의 충의사와 기념관보다는 그의 흔적이 깃든 이 도중도에 들어와 숲길을 걸으며, 그의 생각과 고민을 짚어보는 것이 더 의미가 깊다고 생각한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광현당 옆 숲속에 빈틈을 찾아 들 때 조용한 풍경으로 숲속에 두 개 들어 있는 의자에 앉아 그의 행적을 생각해 본다. 맑은 공기가 폐 속까지 스며든다. 1920년대 후반 한때 유행처럼 번진 농촌계몽운동이 좌절되고 많은 사람들이 포기할 때 그는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거사의 성공에 가려진 그의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 도중도 숲길  윤봉길의사가 태어난 광현당 뒤편의 산책길. 천천히 걷거나 의자에 앉아 사색하기 좋은 길이다.
ⓒ 홍윤호


거사 그 후

그의 거사가 성공한 뒤 고향의 유족들은 해방이 될 때까지 숱한 고통을 겪었다. 극악한 테러리스트의 집안이라 하여 항상 감시와 경계 속에서 숨 한번 제대로 못 쉬고 살았다. 그래도 남편의 죽음을 들은 아내는 베틀에서 일하면서 "그렇습니까? 각오는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 아내의 뱃속에 있었던 아들 윤종은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 일본인 교사의 "조선에서 제일 못된 놈의 집안이 예산하고도 덕산에 있다. 그 집안 아이가 바로 우리 학교에 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결국 윤종은 서울로 올라가 친척의 도움으로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다.

▲ 윤봉길의사의 유품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거사 당일 김구와 맞바꾼 회중시계, 의거 당시 지니고 있던 도장, 손수건, 안경집 등이 있다.
ⓒ 홍윤호


한편,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이후 충칭에 정착할 때까지 8년 간에 걸친 피난을 이어간다. 한인애국단장 김구에게는 약 60만원의 현상금이 걸렸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200억 원에 해당한다.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는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가 일거에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임시정부 입장에서는 '대박'을 친 셈이다. 해외 각지에서 격려의 편지와 기부금이 들어왔다. 이후 임시정부는 매년 4월 29일에 윤봉길을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열었다.

또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특히, 장제스가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칭찬한 일은 유명하다. 이는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장제스는 임시정부를 파트너로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 하나. 제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굳어져갈 즈음 1943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만났다.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만남, 카이로회담이었다.

이보다 앞선 7월 26일, 임시정부의 김구와 김규식, 조소앙 등은 장제스를 만났다. 이들은 한국의 장래 지위에 대하여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고개를 끄덕였고 약속을 지켰다.

카이로회담에서 장제스는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을 설득하여 피식민지국으로는 유일하게 전후 '한국의 독립'을 약속받았다. 그리하여 카이로선언에 다음의 구절이 들어간다.


(특별 조항)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에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이는 후의 얄타회담과 포츠담선언에서도 다시 확인된다.

혹자는 대한민국의 독립이 연합군의 승리에 의해 그저 얻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강대국은 약소민족의 운명에 그리 큰 관심이 없다. 루즈벨트나 처칠이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았겠는가.

다시 말해, 지속적인 독립 투쟁과 수많은 지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들이 한국이라는 약소국의 운명에 약간의 관심이나 두었겠나. 더구나 1914년 이후 일본이 점령한 영토를 제자리로 돌려놓는다는 기본 원칙을 깨면서까지(한국은 1910년에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 이 원칙대로라면 한국은 일본의 항복 후에도 일본 영토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특별 조항을 만든 것은,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가 윤봉길을 통해 세계에 알려지고 연합국의 대표적인 수장 중 한 명(장제스)이 이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의 끈질긴 투쟁과 희생이 윤봉길에 이르러 결실을 맺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윤봉길 혼자 한 것이 아니며, 그를 포함한 수많은 열사, 지사들의 노력이 쌓인 결과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래도 독립이 '거저 주어진 것'이라 말하겠는가.

해방 후 1946년 우여곡절 끝에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내로 송환시켰다. 그리고 7월 6일, 5만여 명의 추도 인파 속에서 이봉창, 백정기와 함께 3의사로 불리며 효창공원에 안장된다. 25세에 순국했지만, 그 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가슴에 혼으로 살아있게 됐다. 

윤봉길, 그는 강한 신념과 용기를 지닌 젊은이였으며,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긴 실천가였다. 이 땅에서 불꽃처럼 살다 간 열정의 젊은이였으며, 어렵고 불우한 시대를 신념과 행동으로 돌파하며 짧은 인생을 마감한 순수한 청년이었다.

▲ 윤봉길 흉상  윤봉길의사 기념관 내에 있다.
ⓒ 홍윤호


그가 남긴 마지막 발언(일본군 헌병대 조사 중 답변)은 마치 비장한 예언가의 예언처럼 기록에 남아 그의 통찰력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천천히 음미해 보자.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물론이고 각 민족이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조락의 시기가 반드시 꼭 온다는 것은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을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리는 없다. 따라서 금회의 사건과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의 효과가 없음은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확히 알게 하는 데 있다."


아래는 참고하시길..


답사 정보

* 주소 및 연락처: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83-5 윤봉길의사기념관
                충의사 041-339-8233
                주차장은 100대 주차 가능, 주차하고 도로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200m
                들어가면 도중도교를 건너 도중도에 닿는다. 

* 자가용으로는 당진-영덕간 고속도로 고덕 IC 에서 나와 덕산 방향 → 덕산 → 덕산온천 지구를 지나면 오른쪽에 충의사가 있다. 주차장에 주차하고 도로를 건너 걸어 들어가면 도중도에 갈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IC 에서 나와 45번 국도 덕산, 예산 방향으로 가도 된다.
내비게이션에서는 윤봉길 생가, 충의사(덕산) 등을 치면 안내해 준다.

* 대중교통으로는 일단 예산에 가는 것이 좋다. 예산종합버스터미널에서 507번, 510번, 511번(해미행) 버스를 이용, 충의사 앞에서 하차한다. 충의사 가는 버스인지 꼭 확인하고 타야 한다. 버스편이 자주 있지는 않아 불편하다. 그럴 경우 덕산으로 가는 버스는 자주 있으므로 일단 덕산으로 가서 택시를 이용해도 된다.
서산시 해미에서 충의사를 거쳐 덕산으로 가는 버스(532번, 하루 5회 운행)를 이용해도 된다.

* 차로 5분 거리에 덕산 온천 지구와 수덕사가 있다. 기왕에 간다면 수덕사 한번 올라보고, 덕산 온천 지구에서 온천욕 하면 하루 코스로 괜찮을 것이다. 동선을 따라 수덕사 → 윤봉길 생가 유적지 → 덕산 온천, 이 순서로 가면 좋다.

식사는 수덕사 일대의 식당들을 이용한다. 산채정식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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