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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기 참회의 편지

최고관리자 0 306 2017.08.20 07:52
참회의 편지
어언 5년이란 시간 만에 다시 쓰게 된 참회의 편지. 내가 가장 많은 아픔을 주었고 내가 가장 많은 용서를 구해야 할 분은 5년이 흐른 지금도 역시 고모입니다. 백일도 채 안 된 갓난아기를 단지 고모라는 이유만으로 그 핏덩이를 41살이 된 지금까지 엄마아닌 엄마 역할을 해 오셨던 본인 아들 보다 나 때문에 흘린 눈물이 많으신 고모. 삼일 밤낮을 엎드려 사죄해도 모자랄 고모... 죄송합니다... 용서 해 주세요. 어린 시절에도 속 썩인 일은 많았겠지만 큰 사건의 시작은 32살쯤 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신용불량 상태여서 제데로 된 직장취직은 꿈도 못 꾸고 안산의 모 주유소에서 숙식을 하며 일하고 있었습니다. 주유소 일이 기름 묻히고 매연 먹어가며 하는 일이라 일이 끝나면 그 핑계로 매일 술이였습니다. 전 술욕심이 많아서 꼭 다른 사람들보다 한잔이라도 더 마셔야 직성이 풀렸죠. 이곳에도 예전에 팀장님이 계절을 바꾸며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당시 저도 그랬습니다. 오리털파카를 입고 여관을 잡고 들어가 마시기 시작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반바지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였습니다. 이때 처음으로 환시 환청을 보고 들었습니다. 정말 미친놈처럼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돌아이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때 주유소에는 유기견 백구 한 마리를 키웠었는데 저를 무척 잘 따랐습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됩니다. 환청이 들려 죽음의 위협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던 제게 이런 환청이 들리는 것입니다. 저 백구가 너 졸졸 따라다니면서 네 다 뺏어먹고 다니는 악마다. 저 악마를 죽여야 네가 산다. 죽여라! 죽여라! 정신이 나간 저는 그만 옆에 있던 각목으로 꼬리치며 반갑다는 백구의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머리가 터지며 얼마나 아팠는지 백구도 그 굵은 개 줄을 끊고 도망쳤습니다. 근데 이 미친 모습을 윗층에서 담배피우던 소장이 보았고 고모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얘 데려라가고, 얘 미쳤다고.. 공교롭게도 그날은 고모 아들 믿음이가 입대하던 날 이였습니다. 자식 군 입대 시키고 우울한 마음인데 이런 전화를 받으니 아마 고모 마음도 마음이 아니였을 것 입니다. 아무튼 고모가 와서 절 데려갔고 계속 환시, 환청등 금단으로 힘들어 하는 저를 정신과, 소화기내과등 여기저기 데려다니며 치료를 해 주었지요. 몇일이 지나자 전 건강을 되 찾았고 고모 집에서 기거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서 간곳이 한국 폴리텍 대학이란 곳이였고 그곳에서 특수용접을 배웠습니다. 나름 이론, 실기 모두 과에서 1, 2등을 하고 있던터라 취직도 수월하는 듯 했습니다. 오라고 저를 먼저 불렀던 카타르 석유 플란트회사에서 프로젝트가 없어졌다며 제 입사는 최소 되었습니다. 비행기 부품을 만드는 곳에 면접을 보고 그곳에서 합격을 했는데 건강검진에서 허리에 디스크가 세군데서 발견 됬다는 이유로 또 최소 됐습니다. 좌절했습니다. 이 사회가 나 한테 도데체 왜 이러나? 나랑 무슨 원수라도 졌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1년 동안 손을 안댔던 술, 담배에 또다시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미친 듯이 마셨습니다. 마시고 취해 실습실에서도 강의실에서도 뻗어 있기가 거의 매일이었습니다. 안타깝게 지켜보던 교수님이 “너 이러다 죽겠다. 일단 조선소에 가서라도 일이라도 하고 있어 좋은 자리 나면 부를께.” 라고 하셨고 그 길로 전 정신차리고 전남 영암으로 갔습니다. 조선소 일은 생각했던 것보다 극한의 직업이었고 약 3개월간 그 곳에서 근무하다가 도저히 버티질 못하고 알고 지내던 형님이 주유소를 하시는 광명으로 도망치듯 떠났습니다. 깨진 바가지가 광명가면 안샐리 없죠. 그곳에서도 매일 술이었고 결근하는 날도 하루 이틀 늘어갔습니다. 참다 못한 형님도 제게 한소리했고 그게 듣기 싫었던 저는 무작정 뛰쳐나와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나 마셨을까... 그만 전 길에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광명성애병원 중환자실 이였습니다. 몸에는 7-8개 호스가 꼿혀있고 사지는 묶여있었습니다. 절망적이었던 것은 내 손가락 발가락 아니 내 혓바닥 입술까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전신마비, 뇌졸중. 그렇게 누워서 눈만 껌벅이며 하루 이틀 열흘이 지나면서 제겐 정말 인생 최악의 절망이였고 이젠 이세상에 대한 미련을 놓고 떠나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제 생명의 불씨는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고모는 기도 안찬다는 표정으로 울기 시작하셨습니다. 저도 울었고 한줄기 삻에 대한 희망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날벼락이 떨어졌습니다. 사형선고가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깨어났습니다. 모두들 기적이라 했었고.. 그 이후 고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경기도 광주에서 광명까지 면회를 오시고 저를 돌보아주시며 말씀도 읽어주시고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병원을 옮기고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시는 고모를 보면서 삶의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 이후로 전 정말 피눈물을 흘리며 악으로 깡으로 재활을 받았고 지금 이렇게 건강합니다. 정말 독실한 기독교인이신 고모의 손을 빌어 하나님이 역사하신 듯합니다. 퇴원하고 한 2년 시골에서 착실하게 살았습니다. 근데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죽다 살아난지 얼마나 됬다고 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같이 살던 원주 고모는 나가 죽어버리라며 저 새끼 괜히 살려놨다는둥 맘에도 없는 소릴 하면서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때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해주셨던 성남고모가 달려왔습니다. 그리곤 네 문제 해결 받을수 있을 것 같은 곳이 있다며 저를 데리고 향햤습니다. 그곳은 횡성에 있는 세계 십자가 선교회였습니다. 시설이 아주 열악했고 방에선 시궁창 냄새가 나는 듯 했습니다. 전 절망했습니다. 이젠 고모가 날 갖다 이런데다 버리는구나 하며 자포자기하고 하루하루 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5년만에 이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전 지난 5년은 없었던 시간이라 여기고 이번에 처음 입소했다는 마음으로 고모를 통해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고모 내 이번에는 꼭 하나님 만나서 새 사람 되겠습니다. 글씨로 수백번 죄송하다고 쓰는것보다 앞으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면서 평생 고모한테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고모 용서해 주세요. 영원히 사랑합니다.

92기 최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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